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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문화 브랜드 리뷰/영화 리뷰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Vs.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by feelosophy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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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시간에 따른 선형적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르다. 게임이나 소셜미디어처럼 상호적이고 상대적이라서 지금 당장이 중요한 것과 달리 관객은 철저하게 거리를 두되 오로지 자기들의 이야기를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연출법이 발달되어 왔다. 

  여기에  시간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이 단순히 영화의 콘텐츠 특성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때 더 흥미로워지는 듯 하다. 스토리텔링이 스토리와 텔링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스토리 역시 내용과 형식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면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구성하는 것은 형식과 텔링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데 많은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공공연하게 과거 회상씬을 사용하거나 수많은 타임슬립 영화의 흥행이 영화의 흐름과 이야기의 흐름의 교차점이 가지는 그 흥미로움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이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비일상적인 시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흥미가 동할 수 밖에 없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좀 더 알려진 영화다. 시기적으로 앞서기도 하였지만 톱 배우인 브래드피트의 외모 변천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팬들은 동기부여가 될만한 비주얼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일명 '저주받은 아이'가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고 노화하는 과정을 역행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벤자민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1인분의 삶을 단지 거꾸로 살아간다. 아버지조차 두려움의 대상으로 내쳐진 불쌍한 노인몸의 아기는 할머니들 틈에서 인생의 지혜와 사랑으로 성장과 회춘을 경험하고 중년의 삶에서 인생의 우여곡절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외모를 떼어 놓고 정신만을 두고 보자면, 벤자민의 삶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삶보다 오히려 축복받은 삶이 아닌가 싶다. 아니, 신체와 외모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불행을 극복하는 과정 자체가 비범한 인생을 살게끔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유년시기를 지혜로움, 성찰의 시간이 주어지고 끈질긴 삶의 인연을 붙잡을 수 있는 깊은 마음을 깃들게 한 것인지 모른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번의 시간은 맞는다고 했던가. 그가 사랑한 여자와 나이가 엇비슷해진 30-40대의 시간은 그의 노인의 유년시간과 청년의 노년의 시간에서 누구보다 값진 시간이 되었고 그래서 이야기는 더 애틋하게 인생의 소중함을 전한다. 

 

  한편,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은 한 사람의 인생은 일시정지를 시켜둔 채로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게 두었다. 그녀는 다행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20대까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나 비현실적인 상황을 정성스럽게도 과학적으로 설명한 불의의 사고를 통해 불노(老)의 삶을 살아간다. 나이들어가는 딸이 친구가 되었다가 이모가 되었다가 할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10년마다 존재를 바꾸어 가며 다른 삶을 살아가는 기구한 삶이 남편이 공사다가 죽은 금문교의 시기에 따른 모습과 교차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인생을 이야기한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의 아들과의 운명적 사랑으로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을 때의 황당한 기분이란 보는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증폭하기 충분했다. 하필 만나도 그 남자의 아들일 것이며, 그 남자는 평생 그녀를 잊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시아버지(?)가 되었다니 말이다. 

 

  벤자민은 동네 유명한 저주 받은 아이로 알려졌고, 오히려 그 공공연함이 한 마을에서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 아델라인은 자신을 추월하여 늙어가는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두려움을 피해 수십년을 도피 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철없는 그는 아이임에도 외모가 꼬부랑 할아버지라서 보기에는 썩 좋지 않을 지언정 경계심을 풀어놓게 만든다. 그들은 그의 내면의 순수함을 좋아하거나 어쩌면 측은지심으로 그와 격의없이 지내게 되고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한다. 반면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고 능력있는 그 여자는 아무래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과연 이 둘의 삶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끝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외로운 삶을 살 것인가. 내게 주어진 저주를 받아들이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낼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들린다. 

  나에게 고난과 역경이 불보듯 뻔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보여지는 삶을 위해 진짜 삶이 없어지는 허무하고 우울한 진짜 삶을 살아낼 용기 또한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두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이 점차 젊어지고 있고 우리 진짜 삶을 사아가고 있는 지 아니면, 나이듦에 따라 지혜롭고 어른다워짐을 포기한채 그저 철없는 사람으로 머물고 말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이라면  벤자민 or 델라?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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