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은 정말이지 드라마 <응답하라 1997>가 인기였습니다. 그 여파로 다양한 패러디 광고가 나타나기까지 했으니까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지금 우리 사회의 허리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생활 십년쯤 되고 결혼을 했다면 위로는 부모님을 아래로는 갓난쟁이 한둘은 껴안고 있을 나이일겁니다. 워낙 경제가 어렵고 고령화될수록 추억팔기 상품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중노년의 추억이 아닌 한창 일하고 아직도 젊다 외치는 우리네 이야기를 하고 보니 또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나집니다. 게다가 90년대 이야기가 '7080쇼'마냥 추억이고 때 지난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울적해지는 것도 같네요.
종이책은 그대로 미디어이며 저장장치입니다. 또 이야기를 가장 최적화하여 드러내어 만들어 낸 상품이죠. 그래서 그 두께나 표지나 종이질이나 활자크기와 글씨체 그리고 간혹 들어가는 삽화까지도 오로지 그 이야기에 맞춰서 존재합니다. 책넘기는 맛이며 누군가 숨겨놓았을지도 모르는 낙엽 혹은 비상금을 찾아보는 쏠쏠함도 있을것이며 성격이 급하면 뒷 내용을 확인해보는 것도 용이합니다.
그러다보니, 먼저 드라마로만들어져서 인물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표정이 눈에 선하더라도 책으로 만나게 되는 <응답하라 1997>은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로 재탄생됩니다. 내가 편한 시간에 맞춰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가며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마음대로 재생속도를 조절해 가며 읽는 것은 능동적인 향유의 즐거움이 아닐까합니다.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책 속의 온갖 상상력을 충분히 드러내기는 영상콘텐츠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상콘텐츠가 만들어 낸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다시 책으로 확장시키고 보자면 그 안에는 안심스런 스토리에 나만의 이야기를 버무려 넣을 수 있어서 널널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를 소설로 다시 내어 놓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꼭 성공하지 않아도 마케팅차원에서 확장콘텐츠를 만들기도 합니다.)
짝사랑에 가슴 아팠던 그 시절.
삐삐로 상대방에 욕을 보내는 이 단순함.
확인했는지 안했는지 알필요 없이 마구 쏘아붙이고 털어버리던 그때.
이런 깨알같은 추억의 재현이라니.
소설 <응답하라 1997>은 꼭 그 시절을 살아온 리타가 보이에는 환타지 투성이입니다. 상업드라마답게 동성애나 삼각관계등의 요소를 품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삶이 참으로 평탄하다고 할까요. 드라마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는 평가는 소설로서는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인물감정을 깊이 파고들어간다면 드라마팬들은 그 괴리에 적잖히 비판을 했겠지요. 주인공들은 천재적으로 공부를 잘하고 승승장구하고 성격적으로 모범적인데다가 외모도 출중하다죠. 여자 주인공은 온갖욕설을 다 하고 공부에 관심없고 오로지 팬질만 하는데 글쓰기 하나로 대학도 잘만 갑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이나 그 갈등의 해소를 위한 몸부림은 오로지 애정과 관련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응답하라 1997>은 재미있고 유익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환타지로 중무장을 하였다지만, 우리의 15년간의 추억을 담금질하면서 그 안에 고민과 슬픔과 좌절과 분노들은 이렇게 잘만 이겨낸 나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지켜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소설 곳곳에 스민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추억과 사람들이 더 가깝고 친밀하게 다가왔다는 것도 좋은 점이구요.
SNS가 키운 관계의 힘은 이렇게 과거 추억의 지인들을 친밀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통해 만난지 15년은 되어도 여전히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아프고 함께 여행을 간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합니다. 추억과 공유되는 즐거움의 트렌드는 이처럼 2013년에 1997년을 과감하게 불러내고 있습니다.
몇가지 옥의 티가 있는 것 같아서 덧붙여 보자면(사실 좀 사소하고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1981년 1월 생인데 2000년도에 고등학생이라는것, 부산대 진학했던 태웅이 서울의 모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는 것, 6년동안 함께했다는 윤제와 준희가 2년반을 기다리고 4년반을 함께 살았다는데 더하면 7년이라는 것.
동료나 친구의 힘.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참 초라하고 힘이 나기 어려운데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이들도 모아놓고 보면 거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추억속에 아무 계산없이 스스럼없이 뭉쳐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동료를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아니면 무엇이나 처음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좀 더 세련되고 멋들어지게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들지는 않을까요.
또다시 15년이 흘러 응답하라 2013이 나온다면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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