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부터 입시스트레스에 시달려온 아이들에게는 1등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큰 훈장이고 목표고 삶의 이유였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다 큰 어른들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죠.
1등이 되려면 반 다른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 해야 하는거고 이는 그들을 다 이겨버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서태지의 노래에도 아래같은 가사가 등장하기도 하죠.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그러다보니 이긴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또 반대로 진다는 것은 얼마나 굴욕적인가를 스무살이 될동안 몸으로 배워왔다고 하면 너무 억지스러울까요.
그러다보니, '지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기는 것'이라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작가 김연수는 '지지 않는다는 말'이 꼭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꼭 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인가, 지지 않으면서 내 나름의 리듬을 찾아 살아가는 것은 또 어떤가 하고 권유하는 듯 합니다.
이 에세이 책에는 작가의 삶의 바운더리(사는 동네인 일산의 특정 지명에 이르기까지)가 등장하고 그의 달리기에 대한 순정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때론 작가들은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여 그것에 대해 글을 쓰기를 좋아하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책 속의 키워드들은 모두 '달리기'를 향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중에서도 고독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시에서는 별을 보고 고독해질 여유조차 없다고 이야기 하는)이라던지, 으레 아는 인사치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웅호걸과 절세가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꼭 그렇게 자신감이 충만해진다는 이야기라던지, 갑의 계획 을의 인생이라고 결심만 하는 우리 일상을 꼬집는 것들이 무척이나 공감이 되더군요.
또한 시인이자 소설가 답게 인간적인 에세이에서조차 드러나는 세련된 글쓰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2장 마지막에 있는 '한 번 더 읽기를 바라며 쓰는 글'입니다. 이 글은 마치 조잡하게 번역된 외국의 소설을 읽는 것 처럼 머리속에서 뒤죽박죽 이야기가 재구성되는 느낌이 듭니다. 바로 모든 문장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니까 마지막 문장이 가장 처음문장이고 처음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기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거꾸로 다시한번 읽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알듯 말듯 하면서도 돌이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꼭 그렇게 되야만 했던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마흔을 겨우 넘긴 젊은 작가의 다소 엉뚱한 습작이었지만, 그 문장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겠다고 끝까지 읽고는 된통 당한 후의 심정은 어디다가 터놓고 이야기 못할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아는척, 이해하는 척 넘어가는 그 문장들을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를 가지게 된 것 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그런 자세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저는 글 중에서 심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고 있을 때 들려오는 박동소리, 그 주기가 짧아지고 그 쿵쾅거림이 크게 드려올 때 느끼는 감정이나 또 사랑하는 그가 이렇게 내 앞에 살아있다는 증거로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심장을 대하는 그 감격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작가도 이야기 했지만 그래서 뛰지 않는 가슴들은 모두 유죄가 확실합니다. 고독마저도 사치가 되는 도시에서 관계와 경험을 나누는 추억을 함께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가슴떨리지 않는다면 지금 먹는 맛있는 음식은 무엇을 위한 것일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세대가 달라 공감하는 부분이 적었다면 적었지만, 이런 부분부분의 가슴에 와닿는 조각 하나하나가 이렇게 마음에 평화로움을 만들어 주었네요. 특히 제목의 '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씻어주는 것 같아서 참으로 위안이고 안심이지 않나 싶습니다.
빨간 코끼리가 아디다스와 나이키를 신고 달리는 간결한 산문집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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