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소설을 읽었습니다. 마음북maumbook이라는 문화예술책모임 에서 마음을 울린 책으로 지후언니가 추천해주신 책 중의 하나였죠. 이 책은 두껍지도 않고 심각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영화 <아멜리에>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산뜻하면서도 완전소중하다싶은 구석이 있는 소설이에요.
은둔형이었을지도 모르는 젊은 여자의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남자들은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소개말에도 나온 것처럼 '문학의 거목들로 가득한 숲속'을 신나고 발랄하게 산책하는 기분이 들어 자못 청량하기까지 합니다. 중학생시절 한달을 걸려 읽어냈던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하고 키에르케고르와 안드레지드의 실제 소설의 인용구를 적절하게 활용한 형식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독자 스스로 다독을 시험받는 듯하기도 하고 이 얇은 책 한권으로 그 유명한 책의 구절구절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습니다.
제목이 그렇다보니 저도 책 중간중간에 밑줄을 그어놓고 싶은 충동을 마구 느꼈습니다. 실용서적이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 책에는 큰 마음 먹고 밑줄을 긋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여전히 감성의 한가닥이 맡물려 제가 이 책의 부분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생각이 더 커서 그 충동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읽어 내려가면서 흐믓한 미소를 지었던 몇몇 구절을 떠올려보자면
'내 삶이 탐탁치 않기로서니, 그게 무슨 상관이랴, 서점에 가면 다른 삶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지 않은가.'
... 그리고 책을 읽는 중에 나타나게 될 너무 어려운 순간, 혐오감이 이는 순간, 아름다운 순간들에 대비해, 비스킷 한 갑을 갖다 놓았다.
이제 겨우 <H>자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 <H>자를 가지고 무얼 하든 관심이 없었다. <불확실하다Hypothetique>는 말에 붙은 H든, <진공 청소기aspirateur>에 H를 붙여 Haspirateur를 만들든... ...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묘하게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나는 <사랑에 빠지다amoureuse>라는 말을 숨을 들이쉬며 hamoureuse라고 발음해 보았다.
의기양양하게 고전을 헤집고 다니던 소설은 이내 여자 주인공으로 돌아와 그녀의 두통약, 소화제와 비스킷으로 독자의 감정을 다스리다가 결국에는 다른 남자와 해피엔딩이라는 김빠지는 듯 하면서도 끝내 미지의 남자를 숨겨놓는 여운을 심어 책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어요.
클로드가 비록 콩스탕스가 사랑한 밑줄 긋는 남자는 아니었어도, 그들은 그 밑줄 긋는 남자의 밑줄에 의해 연결되었어요. 세심하지 않고 다소 유치한 말투를 쓰더라도 내 몸을 덥혀주고 마음을 쓰다듬어 자신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을 헌신적으로 달려드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을 여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주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만족감이 커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책이 나온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여전히 20대 중반의 풋풋하고 아름다운 이들이겠지만, 그 시대의 파리의 묵직한 향취를 간직한 채 도서관 어디엔가 자신만의 밑줄을 감춘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요.
덧, 중간 중간 오타가 보이는데 열린책들에서 다음 쇄에는 수정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곳마다 밑줄을 그어 담당자분에게 연락을 드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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