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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문화 브랜드 리뷰/영화 리뷰

<별을 쫓는 아이>, 가슴에 별을 묻다

by feelosophy 2011.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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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ren who Chase Lost Voices from Deep Below, 2011
신카이 마코토

일본 셀 애니메이션의 특징과 지브리의 특징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초속 5센티미터> 에서 본 것과는 어떤 연결점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냥,
미야자키 영화 아니었나요?


사실 애니메이션을 끝까지 다 보고 영화관 스크린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앉아있었습니다. 그만하면 <별을 쫓는 아이>를 재미있게 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끝났는데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스나는 마치 치히로나 소피가 되살아난 느낌이었습니다.

센은 자기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책임감을 배우고, 소피는 신념을 지키므로서 잃었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아스나는 슬픔을 추억해야만 하는 저주가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고 이야기 합니다.



적어도 제가 신카이마코토를 알게 해준 <초속 5센티미터>는 어린 두 남녀가 성장하면서 그들이 삶이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고, 서로를 그리워 하며 재회하기 위한 시간을 진지하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물론 이번 <별을 쫓는 아이>도 철학적 진지함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단절이나 연결을 상징하는 기차(혹은 기차길)과 시간 그리고 감성충만한 아름다운 하늘이 등장하면서 그 만의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신카이 마코토스러움보다는 미야자키가 먼저 깃발을 꽂아 둔 재패니메이션스러움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인듯 합니다. 신카이마코토의 작품은 서정적으로 아이들의 성장담을 그려내어 슬며시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벚꽃이 1초에 5센티미터를 유선형으로 팔랑이며 떨어지는 광경을 상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애니메이션을 소중하게 각인하도록 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별을 쫓는 아이>는 중간계의 신화를 이용한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생물체들을 등장시켜 화려한 볼거리를 유발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시시각각 배경이 바뀌는 신기한 문이나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 또는 절대 능력의 아름다운 소년을 모아놓고 보는 것처럼. 혹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일본 시골의 전원적인 풍경을 한껏 풀어내는 장면이나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다양한 공간, 혹은 이방인에 대한 배척 등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변주되어 등장했다고 느끼기에도 충분할 듯도 합니다.

거대 프로젝트가 되면서 1인창작자인 신카이마코토의 색깔은 희미해지고 그간 성공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공식을 덧입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미야자키 다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 사람이라는 말을 의식해서 일까요.) 그래서 실컷 신나게 영화를 보고 나서도 아쉽고 실망스러운 점을 감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신카이마코토가 실망할 만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그림자 속에 갇혀서 생명을 의미하는 빛과 물을 멀리하는 닫힌 존재들과 반대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축복받은 아이는 결국 죽음의 관문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삶의 의미를 깨닳게 되지요.

아스나는 반장에다가 1등을 도맡아 하고 집안일도 척척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만났던 소년을 찾는 여정에서 그 아이의 무료하고 메마른 삶은 인생을 소중하게 여길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냉소적이고 맹목적인 모리사키를 돌보면서 그 옛날 별을 향해 지상으로 나왔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슌을 이해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직도 머리속에 맴도는 영화의 마지막 주제가 처럼 hello and goodbye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나면 헤어지고 그리고 삶과 죽음은 이어진 흐름이며, 죽음을 슬퍼하는 저주는 그래서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한 가지 사소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원제가 <Children who Chase Lost Voices from Deep Below>인데요. 한국말로는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온 잃어버린 소리를 쫓는 아이들'쯤 될겁니다. 그런데 한국제목은 부르기 편한 여섯 글자로 된 <별을 쫓는 아이>랍니다. 아스나와 신이 주인공이었던 원제와 달리 슌이 주인공이 되버린 셈이죠.

사실 영화에서 별은 딱 두 번 등장합니다. 오히려 정교한 새털구름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한 깊게 표현한 하늘이나 오로라가 가득 드리워진 하늘이 땅보다 더 많이 넓은 면적으로 등장하여 기억에 남도록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게 합니다. 하늘을 수직으로 날아오르는 비둘기나 휘날리는 벚꽃이나 눈송이를 통하여 신카이마코토다운 멋들어진 화면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별이 등장 했을 때는 슌이 슬프고도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고 죽을 때와 모리사키가 한 시도 잊을 수 없었던 연인을 되살릴 때였습니다. 극적으로 아주 중요한 순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별은 지하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고 그래서 그곳의 이들에게 고독과 고립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바뀌어도  이견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순간이 있었다면 children인 신과 아스나가 깊은 곳의 소리를 쫓으며 우정을 쌓고 교감을 나누며 마침내 숨기고 있던 슌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을 열어 울어 젖힐 때 그 잠깐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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