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건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곧 아이를 낳기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므로 아이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동반한다. 부모다 사람이고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적이 없겠냐만은 그럼에도 아이를 보살피는 노고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는다.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아이들을 잘 돌봐도 돌아오는 것은 누가 낳으라고 했냐는 비수 뿐이다. 부족한 엄마 아빠, 나쁜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이 부지기수고 그러고보니 녹록치 않은 현실에서 점점 아이 낳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많아진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위치가 보장된 의사의 삶을 포기한채 육아에 전념한 40대 가정주부다. 동기였던 남편은 대학병원에서 저명한 의사가 되어 국제 학술지에도 이름을 올리고 명성을 더해가고 아들도 부모 뒤를 따라 의사가 되어 인턴을 시작했으며, 딸도 곧 대학 입시를 앞두었다. 이쯤 되면 나름 행복한 가정을 잘 꾸리는 강남의 중산층 교양있는 안주인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그 흔하다는 비싼 옷, 차, 가방도 없고 돌이켜보면 남편에게 값비싼 팔찌 하나 받아본 적 없다.
많은 엄마들의 삶과 다르지는 않겠지만, 닥터 차정숙은 비록 장농면허라도 의사 면허가 있음에도 그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해 묘한 안타까움이 크다. 마음만 먹으면 페이닥터라도 할 수 있다는데 굳이 인턴으로 전문의가 되려는 도전을 한다. 동기들은 이미 교수가 되었는데 자식뻘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자니 부치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학원에서 동기들보다 서 너살만 많아도, 갓 서른되어 신입으로 회사에 들어가도 눈치를 보는데 무려 스무살이라니. 오히려 그런 극단적인 차이가 아줌마 특유의 붙임성이나 산전수전 온갖 수난 털어내는 속깊음이라는 치트키를 만들어내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차정숙의 인턴 라이프는 참 짠하다.
게다가 남편의 오랜 기간 숨겨진 외도라니. 기가차고 코가 찰 일이다. 남편보다 공부도 잘했던 차정숙은 가정을 잘 지켜내려고 자기 커리어를 포기했음에도 정작 남편은 밖에서 배다른 딸을 낳고 대놓고 병원에서 연애질을 하고 있었다니. 밤사이 곤히 잠든 남편의 싸대기를 날리는 장면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좋고 사리분별력 있으면서 예의까지 바른 차정숙이는 부잣집 딸과 우유부단한 강남 외동아들의 캠퍼스 커플을 갈라놓은 죄로 긴 시간을 돌아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 할일 충분히 했으니 자기 삶을 살겠다는 경단녀를 막을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모든 방면에서 사기캐릭터인 서브 남주가 굳이 필요했을까 싶지만, 밉상인 남편을 골탕먹일 같은 편은 필요한 법이니까.
결혼 전, 출산 전 화려한 스펙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기 삶을 살았던 수많은 경단녀들에게 이 드라마는 왠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다는 다소 오버해서 막장코드에 메디컬 한스푼 넣어 유쾌한 시선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반갑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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