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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문화 브랜드 리뷰/tv 방송 리뷰

옥씨부인전, 다른 사람의 삶에서 나를 찾기

by feelosophy 202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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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지금 누리는 우리의 자유와 평등은 오래지 않았다. 중세 시대 하층민, 그것도 여성은 노동력으로 가치를 매기던 시대에서 가장 하위 계급에 머물렀다. 총명하고 손재주 좋아봤자 타고난 수저가 흙수저조차 되지 못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약한첩 못 지어먹고 죽어가는 어미를 위해 울부짖어도 그것으로 매질을 당하는 처지라면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의 문제 이전의 삶의 의미를 곱씹게 될 수밖에 없다. 

지난 여름 한 학회에서 2000년대 이후 사극드라마에 나타난 여성의 특성에 관한 발표를 흥미롭게 들었다. 발표자의 논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다소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발표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시간 관계상 토론이 가능하지 않아 그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나눌 수는 없었으나 콘텐츠에 드러난 캐릭터는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시대별 여성 주인공의 역할은 변화했다는 것만큼은 동의한다. 

지금 시대의 여성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유교적 관념으로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있었던 시대인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여성 주인공들이 어떤 갈등을 가지고 그것을 헤쳐나가고 있었던가.

 

 

<옥씨부인전>의 구덕은 이름조차 징그럽고 하찮은 생물인 구더기로 불린다. 태어나보니 노비의 딸이지만 타고난 총명함과 재주는 숨길 수 없어서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치고 음씩솜씨며 자수솜씨며 손재주도 야무지다. 기질도 대차다. 하고자한다면 거침없다. 자기의 꿈을 바로보고 그것을 위해 선택과 집중에 책임을 질 줄도 안다. 

자기 재능을 자유를 찾기 위해 돈을 버는 것에 몰두하는 틈 사이로 운명과 같은 사람과의 엉뚱한 인연이 파고들었다. 노비인 구덕과 명망있는 집안의 괴짜 장자의 신분 차이는 애틋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지워버린다. 

 

이제 중반으로 향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이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점이 가슴아팠다. 구덕이는 역관의 딸로 서역의 문물을 경험한 열린 생각의 옥태영의 삶을 살게 되고, 명망 있는 집의 자제였지만 알고보니 서자출신으로 전기수가 되어 한차례 신분 변화를 겪은 송서인은 또다시 옥태영의 남편인 성윤겸의 삶을 연기한다. 

 

비록 옥태영은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을지라도 신분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오해를 통해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옥씨집안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의 인정을 받고 같은 처지였던 다른 노비의 존경과 인정을 받으면서 옥태영의 자리에 걸맞는 삶을 살아간다. 

 

그저 개인의 삶을 돌보기만으로도 벅찼을 시대에 또다른 누군가를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렵게 찾은 삶의 안정을 다시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면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탐이 나는 삶의 영위를 포기할 수 있을까. 바닷가 작은 집에서 아비와 소박한 삶을 꿈꾸었던 구덕이에게는 세상이 180도 바뀌고 꿈꾸는 일도 그만큼 뒤바뀐 것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또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시청자는 지금 시대의 기회의 평등이 부족한 곳에서 애쓰는 누군가로 빙의해 구덕이를 응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왕자와 거지, 도플갱어의 우연의 인생역전이라는 모티프는 기회의 평등이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에 대해 더 증폭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탐나는 누군가의 삶을 가졌다면 분명 그 탓에 돌아오는 책임과 고통 역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래 자신이 가진 가장 깊은 곳의 열망과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나를 버리고 누군가가 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삶으로 나를 더 깊이 아끼고 새롭게 변신할 수 있는 동력을 맞아야만 지금 시대에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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